“성산일출 바려두곡/소완도로 가는구나~(중략)~ 다대끗을 넘어가민/부산영도 이로구나.” 제주도 해녀가 돛배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불렀다는 노래 중 일부다. 19세기 후반 제주 해녀가 부산 다대포(다대끗)를 거쳐 영도에 정착했다. 제주도 밖 ‘육지’에 해녀가 처음 자리 잡은 도시. 부산 앞바다에 쓸 만한 ‘물건’이 많았기 때문일까. 전복이나 미역처럼 입 안에 바다 향을 퍼뜨리는 해산물을 떠올리기 쉬울 테다.

제주해녀 부산 이동경로

부산에 해녀가 늘어나던 시기에 가장 매력적인 해산물은 정작 먹는 게 아니었다. 당시 식용보다 산업 원료로 쓰인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가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20세기까지 감태 등과 함께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산은 바닷길로 수출까지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부산은 제주 해녀들을 부를 독특한 매력이 있었던 셈이다.

“영도 바다에 우뭇가사리나 곰피 등 해조류가 엄청 많았어. 제주도 해녀들이 여기서 우뭇가사리를 캐면 일본에 수출도 많이 했지.” 2022년 1월 영도구 동삼어촌계 해녀 이정옥(67) 부녀회장이 〈부산일보〉 취재진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다. 지금과 달리 영도 앞바다에 해조류가 많았다고 설명하며 우뭇가사리를 대표적인 ‘물건’으로 꼽았다.

“옛날에는 우뭇가사리 뜯어먹고 살았어. 남천동만 해도 선주가 제주도 해녀들을 수백 명씩 데려왔지.” 수영구 남천어촌계 강인공(82), 노봉금(76) 해녀도 우뭇가사리 덕에 제주도 해녀들이 몰려온 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2016년 7월 기장 문동마을에서 실시한 해녀문화체험교육사업에서 채취한 우뭇가사리

이처럼 부산 곳곳에 있는 해녀들은 우뭇가사리 몸값이 높았다는 시절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안미정 교수가 발표한 ‘식민지 시대 한·일해역의 자원과 해녀의 이동’ 논문에 따르면 우뭇가사리라고 불린 천초는 19세기 후반부터 고가로 거래됐다. 우뭇가사리는 건축 재료로 사용되거나 양갱 등을 만드는 한천 재료로 쓰였다.

논문에는 우뭇가사리 가격이 미역과 큰 차이가 났다는 기록도 있다. 1916년에 66배, 1930년대에는 무려 1066배까지 될 정도로 가격 차이가 벌어졌다. 안 교수는 “일본 상인들이 산지까지 가서 우뭇가사리를 구매했는데 부산에서 수확한 것은 품질이 좋아 옷감 광택을 내는 재료로 쓰여 일본 비단 제조상 등이 값을 후하게 쳐줬다”고 언급했다. 일본은 1905년 조선 바다에 있는 우뭇가사리를 조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우뭇가사리 몸값은 시대가 지나면서 크게 꺾였다. 사하구 다대어촌계 윤복득(71) 부녀회장은 “옛날에는 5~6월 전까지는 우뭇가사리를 잡지 않았고, 5월부터 날짜를 정해 다 같이 채취했다”며 “지금은 그게 큰 소득이 없어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산은 값비싼 해산물만 많은 곳이 아니었다. 국내 곳곳을 넘어 일본까지 수출이 가능한 바닷길을 갖춘 곳이었다.

제주도처럼 다른 해녀들과 경쟁도 적은데 양질의 해산물이 많고 유통망까지 좋으니 해녀들에게는 부산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6년에는 일본으로 수출된 해초 중 73%가 부산을 통해 수출됐다는 기록도 있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제주 해녀들이 우뭇가사리를 캐러 출향 물질을 왔는데 부산은 판매하기도 편해 정착하는 해녀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이 육지 해녀의 기원이다.

“여~ 바위로 강 들어그냉 해삼 한 사라 잡앙왕 미역 한 줌 행 놩 합서게.” / “다 잡아분디 강 무신.” /“또시 한 이틀 물질 안 하지 안 해서.”

해녀들이 물질을 위해 테왁, 망사리 등 도구를 메고 영도해녀촌 앞 길을 걸어가고 있다.

2022년 3월 2일 오전 8시께 부산 영도구 동삼동 중리 앞바다. 물질을 준비하던 해녀 2명이 갯바위에서 나눈 대화다. 제주도 사투리로 잠수할 바다 방향을 의논하는 느낌이었지만, <부산일보> 취재진은 아무도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눈치만 봐야 했다.

제주 출신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한 해녀가 “저쪽 바다 들어가서 해삼 한 접시 잡고 미역 한 줌 잡아”라고 말하면, 다른 해녀가 “다 잡아버린 데 가서 무슨”이라고 이견을 보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처음 말을 꺼낸 해녀가 “(그쪽에서)다시 이틀 정도 물질 안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영도 바다에서 물질 중인 해녀.

분명 부산 영도구인데 해녀촌 일대에서 제주도 방언은 꾸준히 들렸다. 2022년 3월 8일과 23일 오전 7시께 같은 장소에서 물질을 준비한 다른 해녀들도 마찬가지였다. 16일과 20일 오후 영도해녀문화전시관 1층에서 장사를 하던 해녀들의 대화도 그랬다. 영도구 동삼어촌계 고복화(86) 해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주말을 버리지 않고 써도 여기 사람들은 잘 알아먹어”라며 웃었다.

이러한 풍경은 부산 해녀사에 제주도가 큰 축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제주도 해녀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 업자에게 고용돼 영도구 등 부산·경남 일대로 향했고, 해방 이후에는 결혼이나 남편 취업 혹은 가족 이주 등을 이유로 부산에 정착했다.

제주도 해녀가 1887년 처음 육지로 진출해 물질한 곳은 ‘부산부 목도’, 부산 영도구라는 게 통설이다. 부산제주도민회에 따르면 1885년 제주도 구좌읍 출신 김완수 씨가 부산 영도구에 터전을 닦은 게 첫 부산 이주라는 기록이 있다. 해녀들 진출도 뒤따랐을 거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1915년에는 부산·경남에만 해녀가 17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다.

1996년 제주도청 수산과 자료에 따르면 1962년에는 제주 해녀 1356명이 부산·경남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수산업협동조합법 개정으로 어촌계가 설립된 해인데 이듬해부터 10년간 해녀 증가 폭은 뚝뚝 떨어졌다. 당시 어촌계에 어장 소유권이 부여된 이후 지역민에게만 물질이 제한되면서 이후로는 이동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해녀들은 영도구와 부산 곳곳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장군 신암어촌계 김정자(72) 해녀회장은 “예전에는 제주도 해녀인 어머니와 나 말고는 연화리에서 물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어머니가 제주도에 가서 해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제주도 해녀는 물질 전수뿐만 아니라 장비 제작에 도움을 주면서 지역 해녀들과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고무 옷을 처음 만든 영도 보온씨테크.

제주도에서 출향한 해녀에게 영도구를 포함한 부산은 특별하다. 여러 장소가 증명한다. 1995년부터 영도구를 지킨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대표적이다. 금융 중심지 강남구 테헤란로에 서울지점을 제외하면, 영도구 남항동이 ‘육지’에 남은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제주은행에 따르면 IMF 경제 위기 여파로 부산역 인근 부산지점은 1998년 영도지점으로 흡수됐다. 2004년 영도지점은 부산지점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동인구가 많은 부산역 주변 대신 영도구에 본점을 남겨둔 셈이다.

해녀를 포함해 제주도 출신이 그만큼 영도구에 많이 자리 잡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다. 제주은행 총무부 관계자는 “영도구는 해녀를 포함해 사업을 하는 제주도 출신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며 “광주 등 다른 지역 지점은 없어졌는데 영도구는 상징적 지역이라는 점도 반영해 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무 해녀복이 국내 최초로 탄생한 곳도 영도구 ‘보온상사’다. 1968년부터 송숙자(83) 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제주도 출신 남편이 함께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고무 원단을 수입해 잠수복을 만들었는데, 무명이나 광목천 옷을 입던 해녀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방한 기능을 갖춘 고무 잠수복 덕에 추운 날씨에도 오랜 시간 물질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보온씨테크’로 상호가 바뀐 업체를 운영하는 둘째 아들 고경영(52) 씨는 “부산에 고무 옷을 판다는 입소문이 퍼져 초창기에는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주문이 이어졌다”며 “1980년대까지 호황이었고, 다른 지역에 기술 전수도 해 줬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부산 해녀가 제주도에 뿌리가 있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도 있다. 1801년 기장군에 유배 온 조선 후기 문인 심노숭은 〈남천일록〉에 ‘기장읍 연화리 죽도 인근에 바위가 많아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하는 해부와 해녀의 이야기가 있다’고 기록했다. 해운대구 청사포 해녀들은 제주도 등 외부 해녀에게 물질을 배우지 않고,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해녀가 생기거나 시집을 오면서 물질을 배운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해안가 마을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산물 채취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며 “청사포 해녀들 말처럼 부산에도 자생적인 해녀가 있다는 시각에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제주도에서 해녀가 정착하고, 기술을 전수하면서 부산 등 육지에 해녀가 크게 늘었다”며 “그렇기에 제주도 해녀를 빼고 부산 해녀 역사를 정리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산 바다에 터전을 잡은 해녀는 꾸준히 줄고 있다. 제주도에서 대규모로 부산에 건너오던 1900년대와 정반대 추세다. 부산 해녀는 800명대 이하로 떨어지더니 일부 어촌계는 소멸이 눈앞이다.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2030세대는 단 한 명도 없다.

부산시 수산정책과에 따르면 2021년 12월 기준 부산 나잠어업인 (해녀·해남)은 784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846명보다 7.3%, 2011년 986명보다 20.5% 감소한 수치다. 미신고자 125명을 제외하면 659명만 신고한 상태다.

부산 나잠어업인은 8개 구·군 중 4곳이 20명 이하인 것으로 추산됐다. 기장군 521명, 영도구 116명, 해운대구 79명, 사하구 22명인 반면 서구 20명, 남구 14명, 수영구 11명으로 조사됐다. 강서구는 1명이었다. 전반적인 감소세에서 지역별 편차도 큰 셈이다. 해녀 연령대 분포를 보면 더욱 전망이 어둡다. 신고 해녀 중 60대 이상이 95.8%였다. 신고한 659명중 70대 이상이 497명으로 74.2%, 60대가 142명으로 21.6%였다. 기장군의 50대 17명, 40대 3명을 제외하면 2030세대는 단 한 명도 없다. 기장군에 해남 4명이 있지만, 해녀 명맥을 유지할 만한 큰 변화는 없다.

고령 해녀들은 사실상 등록만 된 경우도 꽤 있다. 꾸준히 바다에 나가는 80대 해녀도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오랜 시간 물질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호흡이 달리는 데다 각종 건강 문제가 겹치면 바다에 들어가기 어렵다. 이대로라면 부산 앞바다 산증인인 부산 해녀는 소멸이 시간문제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고령 인구가 많아 20년 이상 지나면 부산 해녀를 찾아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며 “신규 해녀 정착금 지원 등 실질적인 정책이나 제도가 없으면 부산 해녀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무 잠수복을 입기 전 해녀들은 물소중이나 속곳 등을 입고 바다에 들어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해녀들을 업신여기기도 했다.

“‘해녀도 사람이네!’ 이런 말 들으면서 우린 살았다고.”

2022년 3월 2일 영도구 해녀문화전시관에서 처음 만난 동삼어촌계 고복화(86) 해녀가 대화 도중 털어놓은 말이다. 젊은 시절 동삼동 바닷가에서 추위에 떨며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순경이 해녀들에게 던진 말이라고 회상했다. 추위보다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와도 부산 해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았다. 낮잡아보고 업신여겨도 먹고 살려고 바다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부모 집보다 낫지. 바다에 가면 돈이 생기잖아. 어머니에겐 돈 달라 못 해도 바당(‘바다’의 제주 말)에 가면 돈이 나오거든”이라 했다.

해녀들은 억척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해녀들을 만나 “물질은 언제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날만 좋으면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차가운 바다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다. 수영구 남천어촌계 강순희(75) 해녀는 “제주도에서 부산에 온 남편들은 그럴듯한 직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며 “삼남매 교육비랑 병원비를 마련하려면 남편이 버는 돈으로 어림도 없었다”고 했다.

물질은 돈이 됐다. 시대마다 달라도 상대적으로 벌이가 크게 나을 때도 있었다. 영도구 동삼어촌계 해녀인 이정옥(67) 부녀회장은 “1979년쯤 대동 양말공장에 다녀봤는데 당시 일당 200원을 준다고 했다”며 “물질은 잘하면 하루에 1500원을 버니 수입이 훨씬 좋았다”고 증언했다.

해녀들은 웬만해선 물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나날이 이어지자 여러 어촌계에서 해녀들끼리 쉬는 날을 정하기도 했다. 영도구 동삼어촌계는 ‘사리’ 전후로 총 3일간 물질을 하지 않는다. 사리는 만조와 간조 수위 차이가 가장 커 물이 세게 흐르는 시기다.

해녀들은 실력에 따라 수입도 천차만별이었다. 바다에서 건지는 양만큼 돈을 벌었다. 해녀들은 보통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기준점이 다른 경우가 있어도 보통 상군은 10~20m, 중군은 7~8m, 하군은 3~5m까지 잠수하는 해녀를 뜻한다. 상군 해녀는 2분 이상도 잠수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 대상군은 상군 중에서도 최상급 실력을 갖춘 해녀를 말한다.

우스갯소리로 ‘똥군’이라 불리는 해녀도 있다. 똥군은 이제 막 물질을 배우거나 깊게 잠수를 못 하는 해녀에게 쓰는 말이다. 동의대 유형숙 한일해녀연구소장은 “잠수 깊이나 숨을 참는 시간이 상군부터 하군까지 분류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며 “물 흐름을 파악하고 물질할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 등도 고려된다”고 밝혔다.

더욱 깊은 곳에서 오래 물질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해산물을 잡는 건 당연한 결과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면 해삼, 전복 등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 상군인 이정옥 부녀회장은 “15m 정도 되는 바다에 가면 큰 해삼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중군과 하군은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 암남어촌계 임원순(88) 해녀는 “상군인 해녀가 많았는데 난 물질도 늦게 배운 데다 귀가 아파서 깊게 못 들어갔다”며 “중군쯤 됐는데 10m 이상 들어가는 해녀들에 비해 많이 못 건졌다”고 말했다. 이에 상군들은 중·하군 해녀들을 위해 얕은 곳에 있는 것은 웬만하면 잡지 않았다.

1880년대부터 부산에 정착한 해녀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해녀를 뜻하는 ‘나잠어업인’을 그대로 풀면 나체로 잠수해 해산물을 잡는 사람을 뜻한다.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기 전 해녀들은 얇은 ‘물소중이’나 ‘속곳’만 입고 일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무시하는 눈초리로 보기 일쑤였다. 제주도에서 출향한 해녀 집에 한밤중 찾아가 문고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젖은 옷을 들고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있으면 힐끗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남천어촌계 노봉금(76) 해녀는 “옛날에는 해녀들을 사람으로 상대도 안 했지. 물소중이 같은 옷을 입고 살을 이만큼 다 내놓고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불턱에서 불을 쬐고 있으면 ‘걸배이(거지)’냐고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곱지 않은 시선에도 해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물질을 반복했다. 동생들 공부시키려고, 자식들 뭐라도 하나 더 먹이기 위해 바다에 몸을 맡겼다. 만삭의 몸으로 물질하기도 했다. 사하구 다대어촌계 윤복득(71) 부녀회장은 “큰아들이 10월 10일에 태어났는데 9월 말까지 물질을 나갔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해녀들 모두 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한 가게에 간판이 두 개씩 있는 암남공원 해녀촌.

해녀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우선 ‘50초의 승부’라 여겨지는 물질은 위험 요소가 많다. 오랜 시간 잠수를 반복하기에 여럿이 함께해야 안전이 보장된다. 부산시 수산정책과에 따르면 2021년 12월 말 기준 기장군 18곳, 해운대구 4곳, 영도구·수영구 2곳, 강서구·남구·사하구·서구 1곳 어촌계에 해녀들이 등록돼 있다. 그들은 단순 조직을 넘어 문화적, 역사적 환경에 따라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어느 지역이든 ‘불턱’은 해녀 공동체를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갯바위 등에 불을 피운 쉼터를 뜻하는데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하거나 물질 도중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곳이다. 해녀들은 불턱에 둘러앉아 바닷속 해산물 정보를 공유하거나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고무 잠수복 보급으로 불턱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지금은 컨테이너 탈의실과 휴게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삼삼오오 조를 짠 해녀들은 두통을 완화할 진통제인 ‘뇌선’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물질할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한국해양대 안미정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는 “남편들이 물질에 따라오는 일본 해녀들과 달리 한국은 여성 공동체가 강하게 형성돼 경조사까지 함께 챙겨 왔다”고 말했다. 해녀들은 물질을 넘어 다양한 지점에서 공생하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부산 서구 암남공원 해녀촌에는 가게당 간판이 두 개 달려 있다. 2016년 태풍 ‘차바’로 해산물을 파는 곳이 모두 무너졌는데, 부지 문제로 서구청과 갈등 끝에 판매 공간이 축소된 채 복원됐다.

해녀들은 상생하기 위해 두 명이 한 가게를 운영하기로 했다. 부산 서구 암남어촌계 강명순(72) 해녀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간판 두 개를 달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녀촌 가게는 제비뽑기로 1년마다 자리가 바뀐다. 여름에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 손님이 많고, 겨울에는 바람이 강해 바다와 멀어야 인기라고 한다. 이사를 하려면 5일 정도 영업을 멈춰야 하지만 “같이 먹고살자”는 생각으로 손해는 감수한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 해녀촌 화이트보드에는 ‘동삼’ ‘봉래’ ‘청학’이라고 쓰여 있다. 손님을 번갈아 받으며 각자 획을 긋는다. 해녀 공동체 3곳이 통합된 해녀촌에서 손님을 균등하게 나누기 위한 운영 방식이다.

부산 기장군 월내리에서 진행되는 백화 현상.

“물건(해산물)이 없어. 옛날보다 많이 줄었어.”

2022년 1월부터 부산 곳곳에서 만난 해녀들 대다수가 한결같이 꺼낸 말이다. 물질하는 동료가 줄듯 바닷속 해산물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햇빛에 물결이 반짝여도 그들은 ‘바닷속이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해녀들의 엄살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해산물이 자라는 바닷속 환경도 오랜 세월 변해왔기 때문이다. 해녀들은 바다 속살을 수십 년간 매일같이 들여다봤다. 서구 암남어촌계 임원순(88) 해녀는 “환경 문제 등으로 물건이 줄어 해녀가 늘어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할 정도다.

부산 기장군 월내리에서 진행되는 백화 현상. 백화 현상이 더 진행돼 성게만 남아 있다.

해녀들은 물건이 없어진 가장 큰 이유로 ‘백화 현상’을 꼽는다. 연안 암반 일대에 해조류가 사라지고, 석회 조류가 붙어 표면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뜻한다. 해양 오염 또는 수온 상승 등이 원인이며 해조류를 포식하는 성게 등이 일부 지역에 크게 번식할 때도 발생한다. 백화 현상은 ‘바다 사막화’ 현상으로 비유된다.

백화 현상이 일어나면 해조류를 먹이로 삼는 전복이나 홍해삼 등이 줄어든다. 영도구 동삼어촌계 이정옥(67) 부녀회장은 “홍해삼이 2~3년 전보다도 크게 줄었다”며 “해녀도 줄어들지만 삶의 터전도 무너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백화 현상으로 미역이나 곰피도 일부 지역에만 붙어 있을 뿐”이라며 “먹이 사슬이 망가져 시멘트 바닥처럼 하얗게 변해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수산자원공단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부산 바다 1546.1ha 중 34.7%인 555.9ha가 백화 현상에 시달렸다. 전체 면적 중 21.4%인 330.5ha에서 진행 중, 13.3%인 205.4ha는 심각한 상태로 조사됐다. 한국수산자원공단 생태복원실 관계자는 “문제가 심각해 바다에 해조류를 심는 바다 숲 조성 사업 등으로 그나마 나아진 상황”이라고 밝혔다. 백화 현상은 같은 면적 기준 2014년 44.9%, 2017년 38.8%를 차지했다.

부산 앞바다는 특히 전국 평균보다 백화 현상 비율이 다소 높은 편이다. 2019년 기준 전국 3만 7921.4ha 중 백화 현상이 진행된 부분은 20.6%, 심각한 면적은 13.0%다.

바다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각종 쓰레기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해양수산부 해양환경정보포털에 따르면 ‘해양쓰레기 수거사업’으로 모은 부산 지역 해양폐기물은 2019년 5318.6t, 2020년 5026t, 2021년 8336.1t이었다. 부산 앞바다가 품은 쓰레기가 매년 최소 수천t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20년 넘게 태종대에서 다이빙숍을 운영해 온 동삼어촌계 조미진(51) 해녀는 “백화 현상으로 불가사리만 남은 지역이 많은데 쓰레기 문제가 겹쳐 회복이 어려울까 걱정된다”며 “최근 영도구 막내 해녀가 됐는데 해산물보다 쓰레기부터 건지려 한다”고 밝혔다. 해양쓰레기는 평소 깨끗하게 여겨진 바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산일보〉 취재진은 4월 6일 영도구 감지해변 바다에 들어가 수심 3~5m 바닥에서 녹슨 고철 등 다양한 쓰레기를 건졌다. 전날 날씨가 안 좋았던 탓인지 플라스틱 등 각종 쓰레기도 해변으로 떠밀려와 있었다.

해녀들은 특히 낚시에 사용된 납추와 밑밥 등도 그동안 해양 오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특히 납추는 2012년 법적으로 사용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바닥에 쌓여 있거나 몰래 사용한 경우도 있는 실정이다.

다대어촌계 윤복득(71) 해녀는 “납추가 쌓이거나 밑밥이 썩은 곳에는 바다가 하얗게 변한 경우가 많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낚시꾼들이 해녀들에게 “고기 있소? 뭐 있소?”라고 물으면 “고기 있냐고 묻지 말고 낚시 밑밥을 줄여야 바다가 살고 고기도 찾아온다”고 답하기도 한다.

부산은 어촌계별로 3~4월이 되면 종패 사업을 한다. 줄어든 수산 자원을 늘리기 위해 어린 전복 등 해산물을 바다에 뿌리는 것을 뜻한다. 보통 어촌계마다 수천만 원 정도가 투입된다. 다양한 해산물 종패는 뿌린 뒤 몇 년 후에 수확한다. 바다에서 몸집을 키워 팔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패 사업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결국 어린 전복 등이 3~4년 이상 자랄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해녀들도 종패를 뿌릴 때 미역 등 해조류가 풍부한 곳에 숨겨 둔다. 그래야 잘 자랄 수 있는데 백화 현상 등이 심화하면 백약이 무효다. 바다 환경이 나빠지면 신규 해녀를 유인하기도 어렵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바다가 오염되면 기존 해녀들의 수입이 줄고, 신규 해녀도 바다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진다”며 “환경이 나빠지면 해녀 명맥은 끊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남천어촌계 해녀(흰색 원)가 물질하는 주변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부산 해녀는 도심에서 물질을 한다. 제주도 등 다른 지역 해녀보다 ‘개발’에 민감했다. 그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일터가 줄어드는 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부산은 많은 해안이 ‘매립’됐다. 해녀들이 물질하던 바다가 육지가 됐다. 1984년 매립된 부산 수영구 민락횟집촌과 주변 아파트 부지가 대표적이다. 남천동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남천만 자리는 1982년 부산도시가스(현 메가마트)를 시작으로 대연 비치, 남천 뉴비치 아파트가 차례로 들어섰다.

수영구 바다 일대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수중 바위군이 넓게 형성된 곳이었다. 미역, 톳, 우뭇가사리 등이 풍부한 데다 이를 먹이로 삼는 해산물도 풍부했다. 박귀한 남천어촌계장은 “군소, 소라, 곰피, 문어, 전복 등 남천동 일대는 해산물이 많았는데 예전만큼 좋은 물건은 안 잡힌다”고 말했다. 수영문화원이 발간한 ‘부산 수영구 도시어부의 삶과 일상’에는 매립 전 남천동, 민락동 바다를 ‘산호가 많아 마치 용궁에 들어간 것 같았다’고 비유한 기록도 있다.

2000년대에도 부산 해안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2003년에는 해운대구와 남구를 잇는 광안대교가 개통했고, 2005년에는 용호만 공유수면 매립 등이 이뤄졌다. 남천어촌계 강순희(75) 해녀는 “처음에는 광안대교 교각에 멍게가 많이 붙은 적도 있었는데 거의 없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전 용당어촌계 소속 이순자(76) 해녀는 “지금은 매립된 용당동 바다에서 물질을 하거나 주변에 좌판을 깔고 팔기도 했다”고 밝혔다.

해녀들에게 미치는 개발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구 송도 앞바다도 상대적으로 뒤늦게 개발의 영향을 받았다. 케이블카가 바다를 가로지르고, 해수욕장 해변에는 새로운 호텔 등이 들어섰다. ‘오션 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초고층 아파트도 인근에 건립됐다. 김민철 암남해변협동조합 사무국장은 “깨끗한 송도 바다에는 멍게도 많았는데 주변이 많이 개발되면서 자취를 감췄다”며 “오히려 환경이 좋지 않아도 잘 자라는 성게가 늘었다”고 말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영도에도 해변에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는 중이다. 동삼어촌계 이정옥(67) 해녀는 “바다에도 햇빛이 잘 들어야 해조류가 많이 자라는데 높은 건물로 그늘이 지다 보니 바다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고 말했다.

기장 신암어촌계 해녀가 물질 후 탈의실이 없어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다.

“해녀들이 ‘물건(해산물)’ 건져올 날도 얼마 안 남았어!” 2022년 5월 3일 낮 12시께 부산 수영구 남천동 남천어촌계 해녀 탈의실 앞. 남천마리나 귀퉁이 좁은 탈의실에서 나온 해녀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오토바이로 인근 시장까지 해산물을 옮겨주는 ‘삼춘(삼촌)’에게 잡은 물건을 맡긴 직후였다.

엄살이라 보긴 어려웠다. 이날 남천동 바다에 들어간 해녀는 3명. 2022년 1월 〈부산일보〉가 만난 80대 한 해녀는 물질할 몸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서구 암남어촌계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송도 암남항 해녀 5명 중 1명은 기관지가 좋지 않아 물질이 어렵다고 했다. 육지 해녀의 대명사 부산 해녀는 소멸 위기다. 부산시 해녀 실태조사 현황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신고 해녀 중 70대 이상은 659명 중 497명으로 74.2%다. 몸이 안 따라주거나 호흡이 가빠지는 나이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길게 봐도 10년이면 대다수 부산 해녀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부산 해녀와 그 문화가 점차 소멸하고 있다.

해녀 문화를 보전하려면 젊은 해녀 유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다. 우선 인프라가 열악하다. 11일 부산시에 따르면 부산 30개 어촌계에서 해녀들이 활동 중이다. 이 가운데 복지회관과 탈의실 같은 편의시설이 없는 어촌계가 8곳에 이른다. 편의시설이 없는 다대포 해녀들은 오래된 배 뒤에 설치한 천막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미리 마련한 민물로 몸을 대충 씻으며 물질을 이어간다. 부산 기장군 신암어촌계 해녀들은 관광객이 이용하는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다대어촌계 박정숙(73) 해녀는 “해녀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지만 제주도 해녀만 혜택을 받는 느낌”이라며 “우리는 배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탈의장이라도 하나 지원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신암어촌계 김정자(72) 해녀회장은 “우리가 해녀도 많고 열심히 물질도 하지만 변변한 탈의실 하나 없다”고 했다.

배 위에 설치된 천막에서 옷을 갈아입는 다대포 해녀.

부산은 제주도보다 해녀에 대한 지원이 열악하다. 제주시는 지난해 해녀 질병 진료비 32억 9600만원, 친환경 해녀탈의장 시설개선사업 1억 8000만 원, 신규 해녀 어촌계 가입비 1000만 원, 신규 해녀초기 정착금 2100만 원, 해녀 문화 공연 운영비 지원 2400만 원, 성게 껍질 분할기 2000만 원 등 65억 1700만 원을 지원했다. 부산시는 지난해 테왁 보호망, 잠수복 지원 사업에 1억 200만 원을 사용했다. 부산이 ‘육지 해녀’ 중심지라 해도 지원 규모와 다양성은 제주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해녀는 잠수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해녀에 도전해도 끈끈한 공동체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는 사례가 잦았다. 하지만 최근 해녀 명맥 단절이 현실화하자 일부 어촌계에서 변화의 움직임도 일어났다. 어촌계 가입비 등을 낮추며 해녀 문화를 잇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남천어촌계 노봉금(76) 해녀는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으면 환영할 듯하다”며 “막내가 들어오면 ‘남천어촌계에 해녀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해녀들이 자유롭고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가 그렇진 않다. 하루 4~5시간 일을 한다고 해도 물질 준비부터 해산물 손질까지 마치면 많은 시간이 훌쩍 간다. 바다 지형 등을 이해하기까지 제대로 된 수익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당장 생계를 책임지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부산시는 신규 해녀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2022년 2월 부산시의회는 ‘부산광역시 나잠어업 종사자 지원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을 공포한 상태다. 어촌계 가입이 확정되거나 어촌계장에게 나잠어업(해녀) 능력을 인정받은 종사자에게 일정 기간 소득 보전과 어촌 정착 지원을 담은 내용이다. 부산시 수산정책과 관계자는 “결국 어촌계가 신규 해녀를 받아들여야 지원 규모도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규 유입이 어렵다면 관광 자원이나 문화적 자원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해녀는 ‘해양수도’를 자부하는 부산에 특별하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가치도 인정받았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드라마 ‘파친코’만 봐도 주인공 ‘선자’가 영도에서 물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2030 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선 부산이 세계적으로 부산 해녀를 활용한다면 각광을 받을 것이다.

특히 해녀학교나 각종 체험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해녀 육성·관광 자원이 될 수 있다.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는 2016~2017년 ‘기장군 해녀문화 체험교육’을 진행했다. 매년 2회, 총 4회를 진행했다. 매주 토요일 8회 과정이었는데 경쟁률이 4대 1을 넘었다고 한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해녀 체험이 부산형 레저관광 상품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다만 유 소장은 해녀 문화 전승이 단순히 ‘물질’에만 집중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육체적 활동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이해하게 할 교육적,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해녀 문화가 제대로 계승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해녀들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면서 일부 지역은 이미 소멸이 현실화했다. 해녀 문화가 국제적 가치를 인정받은 유산이자 보존해야 할 문화재가 돼도 여전히 해녀 문화나 처우에 관한 인식 개선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2022년 5월 10일 오전 10시 30분께 부산 남구 용호동 백운포. 전 용당어촌계 소속 이순자(76) 해녀가 〈부산일보〉 취재진이 있는 갯바위 쪽으로 걸어왔다. 2022년엔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물질 도구가 그대로 남아 있고 휴식 공간이 있는 이곳을 매일 찾는다고 했다.

용당의 마지막 해녀 이순자 씨가 과거 물질하던 곳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용당어촌계 소속 마지막 해녀다. 2021년까진 이곳 백운포 앞바다에서 두 차례 물질했다. 그는 “20대 때 용당어촌계 해녀는 27~28명 정도였다”며 “수년 전까지 3명이 물질했는데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나 이제 혼자 남았다”고 했다.

용당어촌계 해녀들은 신선대 부두 일대가 매립된 이후 백운포 주변에서 물질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는 “사라진 옛 용당동 바다는 ‘물건’이 많았다”며 “매립 이후 해녀들은 옆으로 밀려났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 해녀들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며 “인근 용호동 해녀들도 이제 손에 꼽힐 정도더라”고 덧붙였다. 용당동처럼 해녀 소멸이 눈앞인 지역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말 부산시 신고 기준 강서구 천성어촌계 해녀 1명, 수영구 민락어촌계 해녀 7명으로 해녀가 소멸 직전인 어촌계가 한두 곳이 아니다.

해녀 감소뿐만 아니라 여전히 해녀 문화 보존과 해녀 자체에 관한 인식 개선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많다. 2016년 제주 해녀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고, 2017년 해녀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돼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절 천대받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나 부산시 등 공공기관에서는 아직 ‘나잠어업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나체로 잠수해 어업 활동을 하는 해녀를 뜻한다. 고무 옷 등을 입은 지 오래돼도 예전 명칭을 그대로 쓰는 셈이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용어를 바꾸지 않은 건 해녀를 천대했던 인식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안미정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는 “나잠어업인은 일본이 자국 해녀에게 쓰던 표현이기도 하다”고 했다.

거제시 가조도 진두항 앞바다에서 '예비 해녀'들이 거제해녀아카데미 입문반 교육을 듣고 있다.

2022년 5월 19일 오후 경남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 진두항. 바닷속에 들어간 20여 명이 형형색색 ‘테왁’ 옆에 각자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원 모양으로 모인 그들은 순서대로 물속에 머리를 넣고 두 다리를 힘차게 휘저었다. 텀벙텀벙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가 숨이 가빠지자 물 밖으로 나왔다.

해녀아카데미 이론 교육 시간. 최혜선 해녀가 강사로 직접 참여해 ‘해녀의 물건’에 대해 강의를 했다.

산소통도 없이 바다에 들어간 이들은 ‘거제해녀아카데미’ 교육생들. 강사들이 해녀 양성과 체험을 위해 ‘물질’의 기초인 잠수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부산일보〉 취재진도 고무 잠수복을 입은 채 ‘입문반’ 교육생과 함께 바다를 누볐다.

이번 입문반에는 여성 10명과 남성 6명이 교육생으로 참여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그들은 오리발을 신은 채 바다로 뛰어드는 법을 배웠고, 테왁을 고리로 긴 띠를 만들어 바다를 가르기도 했다. 바다는 잔잔한 수영장과 달랐다. 지나가는 어선이 파도를 일으키면 짠물이 어김없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조명 없는 바닷속은 한 치 앞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수심 6m에 바닥에 바짝 도달해서야 조개껍데기나 해초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고무 잠수복 덕분에 바닷속 추위는 덜한 편이었다.

<부산일보> 취재진도 해남이 되기 위해 수업을 함께 들은 뒤 고무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 었다.

해녀아카데미는 안전요원과 강사를 두고 수강생이 바닷속에 적응하는 연습을 계속 시켰다. 동시에 ‘물건(해산물)’을 건지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수강생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다.

실제 초보 해녀들도 얕은 물에서 미역이나 고둥 수확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거제해녀아카데미 구재서 사무국장은 “해녀 양성반에서는 매일 150번 이상 잠수를 반복하게 한다”며 “하루에 3~4시간 물질해도 먹고 산다는 말은 모두에게 해당하진 않는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당장 물건을 많이 건지기도 어렵고, 손질까지 하자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며 “‘장밋빛 환상’을 깨기 위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는 해녀의 현실을 가감 없이 알린다”고 덧붙였다.

바다 실습 수업이 오후에 열렸다면 오전에는 실내에서 교육을 진행했다. 전·현직 거제 해녀들이 인근 수협효시공원에 마련된 강의실에 나타나 각종 교육을 맡았다. 예비 해녀들에게 각종 경험을 전달하고 공동체 문화 등을 조언해 주기 위해서다. 18일 오전에는 최혜선(43) 해녀가 ‘해녀의 물건’을 주제로 1교시 강의를 했다. 그는 “해삼을 찾으려면 주변에 해삼 ‘똥’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몸으로 배운 정보를 후배들에게 내줬다. 그는 이어 “해녀와 물질할 때는 다섯 숨비(잠수를 한 번 할 때 마다 이동하는 거리) 정도 거리를 띄워 두고 움직여야 한다”며 해녀끼리의 ‘불문율’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

4기 졸업생 하정미 해녀는 “해녀 사회는 능력에 따른 철저한 계급 사회”라고 말했다.

다음 날, 하정미(41) 해녀는 “물질을 하려면 돈, 시간, 체력이 필수”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줬다. 그는 “첫해에 돈 번다는 생각은 버리고 3년 동안 물질에 집중할 각오가 돼야 한다”고 했다. 최 해녀와 하 해녀는 모두 거제해녀아카데미 졸업생이다. 따뜻한 조언도 있었다. 지난해까지 물질한 현삼강(80) 해녀는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학생들과 함께 물질을 나가고 싶다”며 “절대 물건 욕심내지 말고 항상 숨을 아껴라”고 충고했다.

어업권 등 법적 부분과 ‘조수간만의 차’나 ‘이퀄라이징’ 등에 대한 설명은 구 사무국장이 맡았다. 그는 “어촌계에서 바다에 종패를 뿌리고 해녀가 수확하는 과정은 ‘과수원에서 과일을 재배한 뒤 따는 것’과 같은 원리”라며 “고령 해녀처럼 압력 평형을 맞추는 ‘이퀄라이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물질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18살때부터 물질을 시작한 현삼강 해녀는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학생들과 함께 물질을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제 지역 어촌계는 해녀아카데미 졸업생에게 마음을 서서히 열고 있다. 일부 선주는 졸업생을 보내달라는 요청도 한다. 어촌계 진입이 여전히 많이 어렵지만, 신입 해녀가 거의 씨가 마른 부산과 비교하면 선순환되는 구조다. 구 사무국장은 “지난해에도 100여 명이 찾아왔는데 양성반까지 거쳐 물질하는 사람은 8명”이라며 “아카데미 출신 해녀들이 배에 잘 적응해, 서로 의지하며 일을 한다”고 했다.

거제시 진두항 앞바다. 물살이 적당해 ‘예비 해녀’들이 수업받기 좋은 환경이다.

거제해녀아카데미는 졸업생끼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해녀 해산물을 판매하기도 한다. 해녀아카데미 4기 졸업생들이 출자해 만든 협동조합 ‘숨비해물’이 대표적이다. 숨비해물 최신철(40) 기획팀장은 “해녀 문화를 알리고 해산물을 잡는 해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기존 해녀들의 공동체 문화에 접근하는 데 해녀아카데미 경력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뜻을 받아들여 거제도 해녀 선단 90%가 숨비해물과 거래 중이다. 그는 “해남으로 활동하지 않아도 숨비해물 또한 해녀들과 상생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2015년 문을 연 거재해녀아카데미에서는 ‘해녀 양성’뿐만 아니라 해녀 역사와 공동체 교육을 통해 ‘해녀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보전하려는 목적이 크다. 거제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신고 해녀는 330여 명. 실제 물질은 80여 명이 하는 걸로 추산한다. 대부분 70~80대라 4~5년 뒤 해녀가 크게 줄 수 있는 상황. 이러한 위기감에 해녀를 양성하는 학교까지 생긴 셈이다. 상황이 비슷한 부산이나 울산 등지에는 아쉽게도 해녀 학교가 없다.

특히 부산은 제주도 출향 해녀가 처음 정착한 곳이라는 역사성도 있지만 2011년 984명에서 2021년 12월 기준 부산 해녀·해남도 784명으로 감소 추세다. 하지만 체험시설이나 학교 건립 등 문화 보전에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다. 해녀학교는 거제를 포함해 제주도 2곳, 전북 부안군 변산면 등에서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부산·울산·수도권에서 해녀가 되고 싶거나 체험을 원하면 거제로 ‘유학(?)’을 떠난다.

부산에서 수강하러 온 허민성(34) 씨는 “바다를 좋아해 제2의 직업으로 해남을 해도 좋을지 판단하려고 왔다”며 “부산에서는 해녀 관련 교육 시설이 없어 거제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 울주군에서 온 김복희(49) 씨는 해녀인 어머니 뒤를 잇기 위해 거제로 왔다. 그는 “2022년 모집 공고가 뜨자마자 지원했다”며 “이곳에서 잘 배워 사라져가는 해녀 문화를 잇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부산 기장군 천대원 신암어촌계장은 “해녀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책은 젊은 해녀들을 육성하는 것은 물론 부산 해녀를 알리는 데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와 경남 거제시 등은 해녀 문화 전승과 복지 증진을 위해 부산보다 선도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수십 년간 축제까지 열며 해녀 문화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제주도는 2022년 해녀 관련 32개 사업에 예산 243억 500만 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제주시와 서귀포시 사업을 합친 규모로 크게 문화 전승, 복지, 소득, 작업환경 개선 등 4개 분야로 분류된다.

해녀 복지에는 진료비, 고령 해녀 수당, 은퇴 수당 지원 등 8개 사업에 약 122억 원을 투입한다. 해녀 탈의장 보수·운영 등 해녀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7가지 사업도 펼친다. 또 전복, 해삼 등 종자를 사들인 뒤 바다에 뿌리는 ‘수산 종자 매입 방류’ 등 해녀 소득 관련 9가지 사업도 진행한다.

특히 제주도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해녀 문화’를 보전하고 전승하기 위한 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친다.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을 ‘해녀의 날’로 지정하고, 이날과 연계해 제주해녀축제를 진행한다. 해녀 학교와 박물관 운영 등 8개 사업에도 예산 20억 3000만 원을 들인다.

제주도는 2017년 해녀 전담 부서인 해녀문화유산과를 신설하기도 했다. 제주해녀축제와 해녀 문화국제화 콘텐츠 개발, 해녀 복리 향상·소득원 개발 사업 등을 맡고 있다. 경남 거제시도 해녀 육성 사업 등에 열의를 보인다. 매년 나잠어업인 잠수복 비용 50~60%를 보조금 형태로 지원한다. 2002년에는 105벌을 지원하기로 했다. 연말에는 능포동 능포어항에 ‘나잠어업인 쉼터’도 마련한다.

거제시는 젊은 해녀 유입을 위해 해수부에서 실시하는 ‘청년어업인 정착지원금’ 참여자도 모집하고 있다. 만 40세 미만 어업 경영 3년 이하 청년어업인은 자격 요건 심사를 통과하면 1년간 지원금 월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올해는 거제시 소속 해녀 1명이 선정돼 지원금을 받는다. 부산에서도 올해 관련 조례가 제정됐지만, 명확한 지원 규모 등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과 큰 틀에서 비슷한 해녀 문화를 알리기 위해 축제까지 열고 있다. 일본 와카야마현 남부 시라하마에서는 관광객이 참여하는 ‘해녀 축제(아마 마쓰리)’가 수십 년간 열리고 있다. 해녀 전통복을 입고 저녁에 횃불을 든 채 바다에 들어가는 해녀 체험이 가능하다. 일본 NHK 아침 드라마 ‘아마짱’의 배경인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 구지시에서도 8월 첫 주말에 해녀 축제를 연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부산에서 어촌 축제를 열면 해녀 부스를 하나 세우는 데 그치는 수준”이라며 “체계적인 해녀 체험 행사와 축제 등이 있으면 해녀 문화도 수월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말했다.